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문단 편집) == 사고 이후 == * 희생자들의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로 이송되었고 분향소는 서신면사무소 3층 회의실 및 서울강동교육청에 차려졌고 8월 7일에 [[올림픽공원(서울)|올림픽공원]]에서 합동 영결식을 엄수한 후[* 반면 김영재 교사의 영결식은 마도초 교정에서 먼저 거행됐다.] 벽제화장장(현 [[서울시립승화원]])에 화장되어 다음날 아침에 사고 현장 반대 방향인 [[동해]]에 유골이 뿌려졌다.[* 예외적으로 김영재 교사와 채덕윤 강사는 용인공원묘지와 수원공설묘역에 각각 안장되었다. 이후에도 매년 추모식이 끝나면 유족들이 아이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아이들의 유골이 뿌려진 동해로 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740735|10주기 당시 동해에 찾아갔다고 보도된 기사]] 다만 15주기인 2014년에는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세월호 참사]] 등을 고려해 생략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49596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9080900209121002&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9-08-09&officeId=00020&pageNo=21&printNo=24269&publishType=00010|#]] 2001년에 서울 마천동 어린이안전공원 내에 추모비가 세워졌다. * 사고 이후 [[경기도청]]에서 '씨랜드 [[백서]]'를 발간했는데 내용이 백서라고 할 자격이 없는 수준이다. 본래 '백서'란 이런 사건사고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발간하는 책이고 그 내용의 핵심은 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이에 대한 대책인데 전체 300쪽이 넘는 이 백서에 담긴 내용의 대부분은 '피해 가족과의 보상 협의 과정'과 '수습' 과정이고 사건의 원인에 대해서 할애한 페이지는 고작해야 7쪽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2쪽은 사진 한 장만 달랑 있다. 즉, 내용이 담긴 페이지라고는 5쪽밖에 되지 않는다.] 게다가 '대책'에 관해 서술한 내용은 더 가관이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샌드위치 패널에 대한 대책이나 화재 관련 법령 보완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게다가 백서의 내용에는 실제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원만한 사고 수습을 위해"라는 표현이 군데군데 등장한다. 이에 유가족들은 분노를 터뜨리며 '서둘러 사건을 덮어버리려는 수작'이라고 날 선 비판을 쏟아내었고 유가족들 스스로가 십시일반으로 사비를 모아 '씨랜드 백서'를 발간했다. * 사고 어린이들의 부모들은 2001년 3월 23일 [[화성시]]에서[* 당일로부터 2일 전에 시로 승격되었다.] 씨랜드 청소년 수련의 집 화재사고 사상자 보상금 지급 조례가 통과되면서 보상금을 받게 되었지만 어린 아이들의 생명은 그 어떤 것으로도 갈음할 수 없었다. 여자 하키 종목으로 [[1988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 2번의 [[아시안 게임]]에서 2개의 금메달까지 땄던 [[김순덕]] 전 여자 하키 국가대표 선수는 이 사고로 아들 김도현 군을 하늘나라로 떠나 보낸 후 4개월 만에 인천에서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화재 사고]]가 또 발생하자 그녀는 정부의 무책임한 수습에 분통이 터져 현역 시절 받았던 훈장과 메달을 모두 정부에 반납한 뒤 자신의 가족들하고 함께 [[뉴질랜드]]로 영구이민을 떠났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9/nwdesk/article/1785081_30729.html|그 해 8월에 가졌던 인터뷰]] * 그 외에도 사고 희생자들의 부모들은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빠져 생업을 포기하는 경우가 속출했다고 한다. 2009년 보도에 따르면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070473|희생자 18명 가족들 중 13명의 가족들은 희생된 자식들의 동생을 출산했고]] 생존자 중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fbclid=IwAR1hMnSs23DvVJkAvp_9wD9x3hYXuMeMBnMeOgWLb4lEMO3ZwPgyKptjfo8&news_id=N1003439963|PTSD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음이 확인되었다.]] [[https://www.ibaby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0657|관련 기사]] * 한편 이 참사로 인해 당시 6세였던 [[쌍둥이]] 딸을 모두 잃은[* 고가현&나현 자매. 사고 당일이 쌍둥이 딸들의 생일 '''3일 전'''이었다.] 유가족 대책회장 고석 씨[* 1963년생. 당시 제약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는 2006년 <안전교육이 유아의 안전능력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주제로 서울시립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2000년 [[http://www.childsafe.or.kr/childSafetyFoundation/|한국어린이안전재단]]을 설립해서 대표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후 안전문화 유공자로 인정받아 2015년 국민포장을 받았다. * 사고 발생 후 유치원/초중고 학생, 부모, 교사들 사이에서 여름캠프 기피 현상뿐만 아니라 청소년 수련시설에 대한 불신이 만연해졌다. 당시 전국 유치원들의 십중팔구는 7월부터 예정됐던 1박 2일 여름캠프를 취소 또는 보류하고 이듬해부터 당일 캠프, 주말농장 체험 등으로 전환하는 도화선이 되었다. 언론 역시 선진국 수련 시설 안전사례 및 불량 사설 수련원 실태 등을 보도하여 정부와 관계기관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이에 따라 행정당국은 청소년 보호 정책을 강화해 건축법 및 소방법을 개정하여 수련원 건축 자재를 난연재로 하는 등 후속조치를 마련하였다. PC통신과 인터넷 등지에도 추모 분위기가 형성되어 [[http://web.archive.org/web/20020204021757/myhome.cjdream.net/cs3004|'씨랜드참사 희생자 유족회']]란 홈페이지가 개설되기도 했다. [[http://web.archive.org/web/20010604231110/http://galaxy.channeli.net:80/seed23/html/main.html|다른 페이지]] * 2021년 8월 19일 MBC [[심야괴담회]]에 당시 현장보존 보초근무를 한 달여간 섰던 [[경찰청 의무경찰|의경]] 대원의 이야기가 소개됐다. 괴담보다는 참사를 잊지 말자는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그가 보초 철수 이후 이 곳을 다시 찾지 않다가 22년 후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사고 현장을 찾는 장면도 후반부에 나왔다. [[https://youtu.be/aG4Ys4N675Q|영상 1]], [[https://youtu.be/l_hJJkbjcWM|영상 2]] 다만 의도와는 별개로 심야괴담회라는 이름을 써 놓고 사건사고를 주제로 삼는 건 아니지 않느냐는 논란이 일자[* 의도가 좋으면 되는 것 아니냐는 의견과 사건사고를 다루는 타 방송에게 맡겨야지 본 방송이 굳이 사용해야 할 소재는 아니라는 의견으로 갈렸다.] 커뮤니티로 해명 후 해당 프로그램에선 사건사고를 다루는 것은 지양하고 있다. 또한 아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같은 사건을 알기 쉽게 풀어내면서도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라는 방송의 취지에 맞게 사건을 진중한 자세로 다루었기 때문에 시청자들로부터 더 많은 공감을 얻었고 자연히 실제 사건을 예능적인 요소로 희화화한 심야괴담회와 비교되었다. [youtube(4FdYWAIkhr8)] * 2021년 12월 9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도 '마지막 여름캠프'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다. 방송에서는 사전답사차 왔다가 화재를 처음으로 목격하고 이 사실을 당시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알리는 한편 화재 현장에서 아이들을 구출하는 데 힘을 보탰던 송영규 관장 부부[* 화마 속에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구출한 송 관장 부부에 대해 [[백지영]]은 '영웅'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송영규 관장이 재빨리 이 사태를 알리지 않았거나 송 관장 부부의 노력이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송영규 태권도 관장은 처음엔 아이들이 전부 무사히 구출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가 301호실에 있었던 18명의 아이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자신이 미처 그 301호실의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사건으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에도 상당한 [[PTSD]]로 남았다고 한다.]와 희생된 유치원생들 중 한 명인 김세라 양의 아버지와의 인터뷰가 나오는 등 기존에는 대중이나 언론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부분들도 자세하게 다뤄졌다.[* 다만 이야기 친구 3명 모두 방송 초반에는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한 반응을 잠깐 보였는데, 위에도 언급되었듯 당시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 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인 데다 얼마 못 가 다른 이슈들로 인해 묻혔다는 점도 있고 특히 [[BIBI|비비]]의 경우 사건 발생 1년 전인 1998년에 출생했으므로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들어보기는 했을지 몰라도 사건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잘 알지 못했을 것이다.] * 녹화 도중 [[장성규]]의 이야기 친구로 출연한 [[백지영]]이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들으면서 내내 오열하는 바람에[* 이날 출연한 이야기 친구 3명 중에서 백지영의 감정 표현이 가장 강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지영도 한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인데 이 사고로 희생당한 어린이들의 연령대가 방송 시점 기준으로 백지영의 딸의 나이(5세)와 비슷했다. 자신의 자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어린이들이 어른의 부주의로 목숨을 잃었기에 더 크게 공감했다는 분석이다. 또한 백지영 자신도 과거 [[유산(의학)|유산]]으로 한 번 아이를 잃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이들이 희생되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항상 안타까워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백지영에게 묻혔지만 진행자인 장성규 또한 두 아들을 둔 아빠이다 보니 눈물을 참으면서 진행을 이어가는 장면이 종종 잡혔다.] 녹화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따로 녹화를 하던 [[장도연]]의 이야기 친구 [[BIBI|비비]]도 눈물을 계속 멈추지 못했으며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장도연]]마저 희생자 중 한 명인 김세라 양(당시 7세)의 아버지가 불에 타다 남은 [[미소녀 전사 세일러 문 시리즈|세일러문]] 잠옷[* 세라 양이 캠프 전날부터 잊지 않고 챙겼을 정도로 가장 아끼던 잠옷이었다고 한다.]의 잔해를 보고 딸의 시신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를 하다가 말하기가 너무 미안하다며 끝내 울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야말로 엉엉 울면서 녹화가 잠시 지연되는 모습이 편집되지 않고 그대로 전파를 탔다.[* 특히 그동안 꼬꼬무를 진행하면서 장도연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진행하기 힘들어한 적도 없었다. 그만큼 너무나 화나고 슬퍼할 사건이니... 세일러문 잠옷으로 시신을 확인한 이야기는 결국 자막으로 대체되었다.][* 이때 출연자들 외에 제작진들도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녹화가 지연되었다는 후문이 있으며 당시 상황을 증언하던 김세라 양의 아버지도 이 부분을 이야기하다 끝내 울음을 터트리면서 인터뷰가 잠시 중단되기도 했다.] [[장현성]]의 이야기 친구로 나온 [[타블로]]는 3명 중에서는 비교적 감정 표현을 절제하면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지만 타블로 본인도 어린 딸을 둔 아빠인 만큼 참사 당시의 상황을 들으면서 시종일관 참담해했고 때때로 울컥하는 모습도 보였다. * 한편 사건 당시 소망유치원 인솔교사들의 무책임한 대처, 수련원의 부실공사와 안전관리 실태, 정부와 씨랜드 관계자들의 한심한 대응에 대한 부분에서는 이야기꾼과 이야기 친구 모두가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백지영과 타블로는 어린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이다 보니 당시의 막장스러운 상태에 대해 매우 격분했고 타블로는 방송에서 필터링되기는 했지만 아예 장현성과 함께 욕까지 했을 정도였다.[* 중간에 화재 전과 후의 수련원을 촬영한 자료 사진을 보다가 종잇장처럼 구겨진 2, 3층 컨테이너의 모습에서는 3명 모두 "이런 곳에서 아이들을 재웠느냐"며 경악했다. 덧붙여 욕설이 나간 부분은 당시 수련원장이 돈을 아끼기 위해 건물을 부실하게 지었다고 증언한 대목이었다.] 또한 타블로는 방송 말미에 참사가 일어나기 전 아이들이 선생님에게 쓴 편지 내용을 언급하면서 "아이들이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절대적으로 믿었지만, '''어른들은 사실 그렇게 믿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비비도 만약 살아 있었다면 활발하게 사회 생활을 하며 살아갔을[* 당시 30대였던 부모들은 2021년에는 50이 넘는 중년이 되어 환갑을 앞두게 되었다.(30대 후반일 경우 환갑을 맞이했다.)][* 희생된 어린이들의 연령대는 모두 세는나이로 6~7세였으므로 만약 생존했다면 2023년 기준으로 세는나이 29~31세로 한창 사회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할 연령대다.] 많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욕심과 무책임함으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에 시종일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 참사 이후 씨랜드 건물은 2004년경까지 1층만 남아 있었다가 이후 철거되어 빈 터만 남아 있고 2017년 6월 30일 18주기 추모식 때 [[채인석]] 화성시장이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00940.html|참사현장 터에 추모공원을 만들 계획을 설명했다.]] 하지만 2019년 6월 26일 언론보도에 따르면 --[[https://news.v.daum.net/v/20190626083006438?f=m|잡초가 무성하다고 한다.]]-- 이 추모공원에 관한 계획 자체는 완전히 무산은 되지 않은 건지 심야괴담회의 후반부에서 지역 관광 요소로 개발한다는 내용을 통해 재차 언급되었다. 다만 사건 당시의 의경이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에 갔을 때는 여전히 아무것도 없는 폐허로 남아 있었다. [[페이퍼 플랜|기획만 세워두고 진행은 안 되는 케이스]]인 것으로 보인다. * 씨랜드 대표는 사건 직후 바로 구속됐으며 이후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출소한 뒤 참사 장소 옆에 식물원 카페인 [[야자수마을]]을 열었으며 화성시 땅인 화재 참사 장소는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2022년 3월 26일 [[실화탐사대]]에서 방송했다. [[https://youtu.be/RP6XBYp-Gsk|#]]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